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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근 의원,입장문 ) 진중권의 ‘폭력과 상스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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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시아뉴스통신인천/양행복 취재국장 2020. 6. 12.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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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근 의원 (더불어민주당 서구을 )

 

신동근 의원(더불어 민주당 인천 서구 을)이 진중권(전) 동양대 교수 발언에 대해 12일 입장문을 내고 비판의 뜻을 전했다.

 

[다음은 신동근 의원 입장문 전문이다 ]

“보헤미안의 십계명이 있다. 대충 ‘부모 보기를 우습게 알고, 형제 보기를 개떡으로 알며, 친구 배반하기를 밥 먹듯 하라’, 뭐 이런 내용이다. 물론 대책 안 서는 망나니가 되라는 뜻이 아니다.

 

인간관계의 망이 답답한 구속으로 작용하는 시대에,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관계의 유형을 만들어내려면 과감히 ‘개새끼’(원문 그대로임)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게 보헤미안이다. 그런데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보헤미안 흉내를 내며 사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인간관계의 점성(=끈적끈적함)이 워낙 강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보헤미안이 되었다가는 욕만 얻어먹는다. 욕을 먹는 것은 사실 별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런 짓 했다가 남들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는 데 있다.”/진중권의 책, '폭력과 상스러움' 중에서

 

 

진중권은 문제의 핵심을 직격하는 ‘날카로움’과 그 특유의 ‘싹수없음’이 결합되어 일찍이 정치사 회비 평가로서 나름 명성을 쌓아왔습니다.

 

‘조국 정국’에서 조국을 저격하며 ‘강남좌파’의 허위의식을 까발리면서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언론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아 왔습니다. 특히 좌파 지식인으로서 좌파세력과 민주당에 대한 비판은 ‘말이 되는 우파 스피커의 부재’ 속에 우파 언론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기대주로 떠오르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진중권의 한마디가 곧바로 언론의 기사가 되는 지경에 이르자 진중권의 ‘글과 말’이 언제부터인가 심하게 어지러워지더니 이제는 난사 수준의 침 뱉기가 돼 가고 있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오지랖이 넓은지 단순히 일탈한 특정진보인사나 단체에 대한 비판을 넘어 86세대와 민주당에 대한 비판, 나아가 진보진영 전체에 대한 비판까지 전방위적입니다.

 

비평의 수준도 미학자인 진중권 자신이 강조했던 ‘구제비평’처럼 비판이 단순이 상대를 절멸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상대의 오류 속에서도 구제해서 보존할 수 있는 건전한 방향의 비평을 뛰어넘어 상대를 절멸코자 하는 저주의 수준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제는 “문재인 대통령은 남이 써준 연설문을 읽는 의전대통령”이라는 상식을 벗어난 ‘폭력적이고 상스러운’ 발언을 접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의 잘못된 정책적 판단에 대해서는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의 대표인 대통령에 대한 비판은 품격과 예의가 있어야 합니다.

 

정치의 시작은 사람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엔 관계가 형성되고 그 사이의 윤활유가 ‘etiquette’(예절)-‘protocole’(의전)입니다. 예절이라는 기준과 절차는 관계를 더 유익하게 하며 그것에서 확장된 단위를 의전이라고 표현합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많은 것들이 변하고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불변의 진리는 기본이 지켜졌을 때 비판도 더욱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진중권 비평의 범위와 수준이 한도를 넘었음에도 진중권에 대한 비판은 그의 표현대로’ 똥밭’에 발을 담그는 일로 짐짓 못 본체 해 왔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총선을 앞두고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는 의도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저는 진중권의 비평이 파장을 일으킬 때마다 진중권의 글, 발언 하나하나에 반응하기보다는 그의 ‘싹수없음’의 근원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진중권은 보헤미안을 자처합니다. 보헤미안에 대해 국어사전은 이렇게 말합니다. ‘속세의 관습이나 규율 따위를 무시하고 방랑하면서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시인이나 예술가’ 상당히 낭만적인 향취가 납니다. 그러나 한 꺼풀만 벗기면 진중권에게 ‘사회적인 것’, ‘인간관계’는 끈적끈적한 것이 되고, 자칫 귀찮고, 벗어나고 싶고, 버려야 할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보헤미안이라는 낭만은 언제든 ‘반사회적 인격장애’로 진화합니다.

 

물론 진중권은 다른 대목에서 이런 알리바이를 남겨 놓습니다. “한국인의 정체성은 패거리의 정체성이다. 에고는 있어도 주체는 없다. 집단은 있어도 사회성은 없다.”

 

진중권의 문제는 그의 말마따나 사회성에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에고’에 과도하게 몰두하는 데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진중권에게 관계 맺는 대상이 공동체든, 집단이든, 개인이든 본인의 에고와 충돌하면 뒤돌아보지 않고 그 관계 맺기를 단절합니다. 그리고 사정없이 공격을 쏟아붓습니다. 오랜 친구 꾹이와도 그랬고 유시민과도 그랬습니다. 정의당과도 그랬습니다. 정작 본인도 586 운동권 출신이면서도 시치미를 뚝 떼고 비난에 몰두합니다. 이제는 문재인 대통령까지 타깃으로 합니다.

 

진중권의 보헤미안적 영혼은 모든 관계를 초월하고 자신을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위치에 놓습니다. ‘초월적 심판자’에 자신이 있다고 착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런 착각이 인간관계의 점성을 벗어던지는 유일한 방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호모 데우스(Homo Deus)!’

 

보헤미안답게 진중권은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고 박수 쳐주는 이들과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를 맺습니다. 그것이 미래 통합당이든, 국민의 당이든 가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에고의 자유를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진중권은 자유를 추구하되 고독과 대면할 용기는 없습니다. 그러다 수틀리면 또 다른 영혼의 거처를 찾습니다. 갈수록 거처할 것은 사라지고 진중권의 영혼도 메말라갑니다.

 

도그마에서 하루속히 벗어나야 합니다. 거버넌스, 시스템, 협력과 공유가 거추장스러운 사람에게 대통령의 연설문은 대통령이 고독하게 직접 컴퓨터 자판 앞에 앉아한 자 한 자 완성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을 초월자라 생각하는 이에게 대통령의 연설문에 담긴 철학은 하찮은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도그마에서 못 빠져나오게 되면 병이 됩니다.

 

진중권에게 메마른 애정이나마 쥐어짜 말하겠습니다. ‘멈추십시오.’ 당신에게 지금 진짜 필요한 건 ‘힐링’입니다. 더 폭력적이고 상스러워지기를 그만둬야 합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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